노동절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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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민법의 소유권


프랑스에서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은 그때까지 이어져온 인류 역사의 틀을 깬 사건이었다. 왕의 정치가 폐지되어 공화정이 시작되었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피어나는 신흥 자산계급들의 필요에 의해 법전도 만들어지게 된다.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상법 등으로 이루어진 '나폴레옹 법전'이 그것이다. 근대 민법의 '소유권 절대' ' 계약 자유' '과실 책임'의 원칙은 자본주의적 재산의 형성과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희생은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새로운 질서의 하층민인 임금노동자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1760~1840년)의 기간을 거치며 기계의 발달과 도시로 인구의 집중 등을 통해 자본주의는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지만, 그 이면에서는 임금노동자의 너무나 큰 희생이 뒤따르고 있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노동자

 

점점 열악한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필연적인 저항이 잇따르자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을 이용하던 자본주의는 급기야 어린 아이들을 처참한 노동의 현장으로 몰아넣는다.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전체 노동자 중 아동들의 비율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주요 산업의 아동 분포는 위의 표와 같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환경에서 강한 들풀이 자라나듯 생존마저 위협받게 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필연적이이었다. 사람을 가축보다 못한 도구로 사용하는 이러한 행태들은 당시를 살던 많은 사람들에게 고민을 안겼으며, 이로 인해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문제점을 짚어내려는 노력이 계속되는가 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한 실천이 이어진다. 


1864년에 시작된 제1인터내셔널은 한 기업이나 국가의 모순이 다른 국가의 그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여 국제적인 노동자들의 단결을 모색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 시작


유럽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밀려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의 수는 내전(미국 남북전쟁)이 끝나는 1865년을 지나며 2,500만 명을 넘어섰는데, 폭발적으로 늘어난 노동자로 인해 노동 조건은 더욱 열악했으며 노동 강도는 더욱 세질수밖에 없었다. 멀리 아시아의 중국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을 습격하여 사망케 한 사건을 비롯해 구직난과 삶의 질 하락으로 노동자들간의 갈등은 남녀, 인종, 세대에 따라 그 골이 깊어갔다. 이에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의 헤이마켓광장에서는 살인적인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조건의 개선 등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으나 경찰의 폭력에 물들었고 재차 열린 집회 역시 폭력으로 정리되어 제1인터내셔널 회원이자 '노동자 기사단'의 멤버였던 어거스트 스파이스 등은 집회의 주동자로 몰려 교수형을 당한다.


1889년 재정비를 해 출범한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과 인류의 해방은 국제적인 조직을 가진 프롤레타리아의 힘으로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권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들이 구호는 8시간 노동의 입법, 아동 노동 금지, 야간노동의 규제와 주휴제 시행, 차별 없는 노동조건 등의 내용으로 '국제노동기구(ILO)' 규약을 근간으로 각국의 헌법과 노동법, 그리고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한편 제2인터내셔널은 시카고에서 벌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리고 추모하며 1890년 5월1일부터 '노동절(May Day)' 집회를 열기로 결의하였고 지금도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이 집회와 가두행진 등을 벌이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이후 만들어진 국제연맹은 국제노동기구(ILO)를 설립하기로 하여 노동자들의 기본권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제도일뿐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바뀌는것은 유럽 노동자들의 무수한 피와 희생의 대가로 한발짝씩 나아가게 되었다. 국제노동기구(ILO)에는 나라별로 가입을 하고 각각의 조항 하나에 서명하여 가입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180개가 넘는 조항 중에서 약 25개 정도만 가입하고 있는 상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44년 5월 10일 제26차 회의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어 다음과 같은 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필수불가결하다" "일부계층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에 위험하다".



한국의 노동운동


일본제국주의의 수탈과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였던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1920년대부터 본격화한다. 수탈과 탄압이 더 할 수록 투쟁도 일어나게 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절 행사. 1922년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섰으며 1923년 노동절에는 조선노동총연맹의 주도로 기념행사가 열렸고 1924년 군산도정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는 등 1920~1925년 사이에 약 3백 30여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1935년에는 서울 자동차회사 운수노동자의 파업,흥남비료공장, 함흥 철공장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1931년 5월 28일 평양의 평성고무공장에서 일하던 강주룡은 대동강변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최초의 고공농성을 했는데 밑에서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백 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2천 3백 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농성중인 강주룡.(사진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제국주의 압제로부터 광복한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출범했으나 미군정에 의해 1947년 노동절 직후 불법화되었으며 노동절 집회는 금지되기에 이른다. 이후 어용단체인 <대한노총>이 노동절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 그 정신을 훼손하게 되는데 그들은 노동절 집회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지지하는 결의대회로 변신시키는가 하면 "북진통일 없이는 노동자의 살 길도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급기야 이승만은 1957년에 "메이데이(노동절)는 공산 괴뢰 도당들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니만치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며 노동절 날짜의 변경을 지시한다. 좌빨 종북몰이의 시작인 것이다.


 

소녀들의 희생을 딛고 성장한 한국의 70년대 자본주의


국민들이 죽음에 내몰리고 피난다니던 전쟁의 와중에도 장기집권을 꿈꾸며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고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한 이승만은 1960년 4.19혁명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곧바로 탱크를 앞세워 등장한 반란군 박정희의 집권으로 세상은 더욱 깊은 암흑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1960년의 '4월 혁명' 이후 민주주의 회복 열기 속에서 결성된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은 1961년에 노동절 집회를 열었으나 불과 한 달 뒤에 등장한 박정희 반란군 세력에 의해 간부들이 체포, 구금되어 해산된다. 박정희는 집권 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만들게 하고 4월 17일을 ‘근로자의 날’로 선포해 노동절의 정신과 가치가 계승될 여지를 없앴다. 1994년 김영삼 정권에 와서야 5월 1일로 기념일이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이름은 찾지 못한 채 ‘근로자의 날’이 공식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일 년에 단 하루 모여 집회하는 기념일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가 어째서 이처럼 적대적인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하루를 기념하고 쉬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에서 기인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기에 접어들어 겉으로는 발전 되는것으로 보였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배를 채우는 구조가 심화되어 10대의 어린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조국은 점점 근대화 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 해야 방값과 풀빵 하나 사먹기도 빠듯해서 끼니는 거르고 추워도 연료를 때지 못하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더우기 시골에 두고 온 부모와 많은 수의 형제들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들은 이중고 삼중고에 시달리지 않을수 없었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가발 등의 수출 성과를 군사반란군세력과 소수의 재벌들이 모여 나누었다.


구로공단 등을 조성하고 기계식 생산을 시작한 자본가들에게 싼값에 말까지 잘 듣는 노동자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물론 자식도 많이 낳아 가난에 허덕이던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공장 등 기업의 운영자들은 농촌의 아이들에게 서울 가서 공장에 취직하면 돈도 벌고 밥도 잘 먹을수 있으며 공부까지 할 수 있다고 꾀여내 노동자로 이용했다. 이 방식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어린 아이들을 속여 데리고 가서 '근로보국대'와 '근로정신대'로 부려먹은 수법과 거의 유사하며 150년 전 유럽에서 아동 노동자를 착취하던 구조와 한치도 틀리지 않는 것이었다.



전태일


탄압은 저항을 낳는 법. 생존조차 위협받는 벼랑에 몰린 노동자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투쟁의 몸짓을 시작하게 되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밥 잘먹고 사는것이 꿈이었던 1948년생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등 합법적으로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고 여기저기 호소했지만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기만적임을 인식하고 거듭나게 된다. 어린 여공(시다라고 불린)들에게 자신의 차비를 털어 풀빵을 40여개 사서 나눠주고 청계에서 쌍문동까지 걸어 출퇴근하던 전태일은 이땅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놀아나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깰 수 있을지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한다.


우리들은 속고 당하고 살면서도 그것의 실체를 알지 못한 바보들이라는 의미에서 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로 정했던 그는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에 불사르며 모든 노동자들이 각성하여 투쟁을 통한 삶의 구조를 바꿀것을 간절히 바라며 세상에 경종을 울린다. 사회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는 내었지만 이 땅의 근본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던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성은 이때부터 각성을 시작하여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것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공장 등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는 등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한편 노동자들로부터는 노농자의 삶 자체를 배우게 되는 투쟁이 줄기차게 이어지게 된다.



모두의 각성과 투쟁의 물결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문제가 이 사회 근본적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된 수많은 대학생을 비롯한 지성인은 민주화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각성은 노동조합의 설립과 투쟁으로 이어졌다. 1979년 우리 기업들 중 수출 15위이던 YH무역은 노동조합이 생기자 회사 문을 닫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직장을 잃게 된 여성노동자들은 항의를 하며 농성에 들어갔고 급기야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반란군 정권은 무장한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진압하기 시작해 여성노동자 중 한명이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무너지는 모든 것은 그 징조가 나타나듯 이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수많은 저항을 야기한 박정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박정희에 못지 않은 악랄함을 보여준 전두환에 이르러 노동자 탄압은 극에 달하지만 그에 비례해 죽음을 각오한 투쟁 역시 들불처럼 이어졌다. 서울대 학생이던 박종철의 고문에 의한 사망과 연세대 이한열의 죽음으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무직 노동자들의 가두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반란군 전두환 권력은 종말을 맞게 된다. 


 

사회의 중심으로 우뚝선 노동자들


이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주인으로 자각하고 함께 힘을 모아 투쟁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은 열정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방향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투쟁은 패배만을 부를 뿐이다.


하지만 1980년대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시작되었고, 그 여파는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국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던 1997년에 닥친 외환위기로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났다.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어쩔수 없이 취업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비인간적인 세상으로 변화되고 되었다.


 

자본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의 단결로


18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새로운 발전을 이어왔다. 법률이 만들어지고 제도가 개선되는 등 노동자의 권리도 많이 찾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 모든 발전은 누군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과 피의 댓가라는 것을. 어쩌면 자본가들 역시 희생자일수 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 건기가 오면 모든 물이 말라버린다. 몇모금 남지 않은 물을 찾아 많은 동물들이 몰리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서로 쟁탈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 사회 역시 한정된 돈을 놓고 다툴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쪽이 양보하면 다른 한쪽이 손해를 봐야하는 것은 물을 나눠 먹어야 하는 초원의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지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노동조합들이 파업(헌법 제33조)을 하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면서 수구언론이 선동하고 국민들은 그에 부화뇌동한다. 집회와 시위(헌법 제21조) 현장을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길을 막고 불편하게 한다며 욕을 하는 이도 있다. 모든 국민은 각자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서로의 권리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봐야한다고 헌법은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자기 땅이라 하더라도 주위 건물들의 일조권을 가리게 되면 땅주인 마음대로 건물을 지을 수 없다. 또한 어느 권리가 더 중요한 것인가는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결정된다. 길을 지나는 행인 개인의 입장에서는 집회하는 노동자들로 인해 자신의 보행할 권리가 침해받는것으로 생각될 수는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을것을 요구하는 권리가 길을 지나는 행인의 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되므로 대한민국의 헌법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무척 힘든 삶을 이어오고 있다. 국가적 위기의 원인은 바로 재벌기업들이었으나 국민들의 세금과 금모으기 등을 통해 경제를 회생시켰지만 그 결과로서의 힘든 삶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재벌과 정부의 국민에 대한 권리침해가 심각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광장에서의 요구와 1890년 제1회 노동절에서의 구호는 '8시간 노동'이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는 역사의 아픔과 투쟁을 통해 8시간 노동 등의 노동권리를 조금씩 찾아온 것이다. 길 막고 집회하는 노동자들을 비난한 적이 있다면, 하지만 스스로도 힘들게 사는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5월 1일의 집회 대열에 동참할 것을 권한다. 자본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는 이유를 되새겨야 하는 날. 바로 노동절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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