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뮌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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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대혁명은 루이16세를 처단하고 공화정을 수립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황제정치가 이어지고, 나폴레옹 사후 공화정과 왕정의 반복은 1848년의 혁명, 1850년의 반동을 거치며 부침을 거듭합니다.


1870년 프로이센의 프랑스 침공으로 촉발된 전쟁은 프랑스 정부와 군대의 항복으로 싱겁게 끝나는 듯 했으나 애국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뒤섞인 파리 시민들의 저항과 무장투쟁에 의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는 시민들이 세운 자치정부(코뮌)가 수립되어 소수의 몇사람이 아닌 다수의 민중이 참여하는 정부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등장한 형태의 정부였습니다. 프랑스 정부군(베르사이유)은 적군인 프로이센 군대와 함께 파리로 진입한 5월 21일부터 잔인한 살육을 시작해 '피의 일주일'을 역사에 남깁니다. 정부군은 항복한 시민들을 즉결처분 형식으로 살해했는데 그 수가 2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칼 맑스는 대혁명부터 1871년까지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프랑스혁명 3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각각의 기록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1871년의 파리코뮌을 다룬 <프랑스 내전>은 사건이 종결된 후 며칠 만에 발표되어 현장감이 묻어나는 글입니다. 엥겔스는 "혁명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파리코뮌을 보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코뮌의 정신과 가치를 새겼습니다.



1870~1871년의 전쟁 이후에 파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외의 어떠한 혁명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승리 이후 권력은 만장일치로 그리고 전혀 이론의 여지없이 노동계급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책의 대상 시기로부터 20년이 지난 그때조차도 노동계급의 지배가 얼마나 불가능한 것이었는가가 입증되었다. 한편으로 프랑스는 파리를 곤경 속에 내버려두었으며 파리가 마크마옹의 총탄으로 피를 흘리는 것을 방관했다.


한편으로 이로 인해 보나파르트식의 전쟁 시대는 급속히 종결되고 평화로운 산업 발전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전대미문의 잔혹함과 예측불허의 결과를 가져올 세계대전 이외에 어떤 전쟁도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때문에 군비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세금은 비정상적 수준으로 올랐다. 


이러한 사정은 빈곤한 계급을 사회주의의 품으로 내몰았다. 미친 듯한 군비 경쟁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알자스로렌의 병합이었는데, 이 때문에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고 상대방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양국의 노동자에게 그것은 단결의 새로운 끈이 되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기념일은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 공동 기념일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사>.카를 마르크스 지음. 임지현・이종훈 옮김. 중 엥겔스의 서문.







여기 파리코뮌을 다룬 영화를 링크합니다. 5시간 46분의 엄청난 길이의 영화입니다만 길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방송 카메라가 당시의 현장에 들어가 취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상과 의견들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그리고 민주적 국가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시청자가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도록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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