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에는 지구에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땅 주인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땅을 돈 주고 산다. 다음 사람에게 팔 수 있다는 믿음을 국가가 심어줬기 때문이다. 맨 처음 돈 받고 판 사람은 누구일까.
땅을 중심으로 벌어진 빈부격차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고 공고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강남 불패’나 ‘부동산 불패’라는 유행어가 상징하듯 한강은 대한민국의 사회구조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경제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사회적으로는 주류와 소외로 나누어 사실상 계급을 형성해 콘크리트를 쏟아부은 것처럼 공고한 틀로 굳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고, 특히 대를 이어 전달되면서 새로운 세대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길 없는 형틀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만 잠깐 이용할 토지를 소수의 자들이 권력을 이용해 대대손손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동강물을 돈 받고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이 울고 갈 일입니다.
사라진 예의
5·16 반란 직후에 서울시청 앞에서 찍힌 박정희의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서 있는 그의 옆에는 권총을 찬 두 명의 부하가 서 있는데, 특히 가슴에 수류탄을 매달고 서 있는 자의 표정은 매우 험악합니다. 이 자는 18년 뒤인 10·26 사건에서 총탄을 맞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청 앞 사진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일들을 암시하는 분위기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두환도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군인 신분인 그가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즐비한 틈에 다리를 쩍 벌리고 팔장 낀 채 뒤로 기대앉은 장면이 그것입니다. 계급이 생명인 군대에서 자신의 보직과 실권의 위세를 그렇게 드러낸 것입니다.
전두환도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육군 대장 계급장을 단 후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박정희의 개량판인 전두환은 군대의 보안사령부와 특수전사령부를 앞세운 공포정치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탱크와 총을 앞세워 실제로 권력을 장악한 이들에게는 위아래도 없고, 헌법 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두 반란군은 사람이 사람을 대함에 있어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본분에 따라 격에 맞는 언행을 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가 간직해 온 사람의 예의를 박살 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곳곳이 마치 조직폭력배들이 이권을 차지하기 폭력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죄는 몇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해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세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짓밟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반란군에 굴하지 않는 국민의 목숨 건 투쟁이 1980년의 광주항쟁과 1987년의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결국 군사독재를 끝장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권력을 쥔 긴 세월은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약육강식과 조폭식으로도 모자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사냥꾼에 의해 유린당하며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서 빠져나올 기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생명 경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한 방식이 동원되면서 공식 발표에 의한 사망자만 77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았으니, 평균 열흘에 한 명꼴로 노동자가 죽어도 중단없이 공사를 강행한 것입니다. 빨리빨리, 밀어붙이기식의 공사 관행은 겉으로 성과를 드러낸 ‘한강의 기적’ 이면에 오늘까지도 부실 공사로 인한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는 1994년의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이어져 성장의 크기에 비해 그 그늘이 훨씬 넓고 깊게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두고 그저 국가 경제 규모가 작아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반란군 세력은 권력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쌓았고 그에 아부하는 사회 각계의 지배층도 그에 비례해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니 국가적 강도와 도둑이 들끓은 시대였습니다.
예를 든 두 가지 예의 공통점은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의 생명을 가벼이 여긴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자녀의 생명은 끔찍이 아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사회적 신분 대물림
탱크를 앞세워 불법으로 국가를 강탈한 세력, 그에 빌붙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은 자들과 그 자손들이 축적한 상상을 초월하는 부는 그간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예 없었음을 설명합니다. 박정희부터 전두환을 지나는 동안 공갈과 협박, 폭력의 방식으로 진행된 조폭식의 국가 운영은 정의를 가치로 삼은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를 무너뜨렸고 반란군에게 아부하는 자들만의 협잡은 경제질서를 원천적으로 붕괴시켰습니다. 그렇게 이득을 얻은 자들이 부정부패와 독재의 친위세력이 되어 오늘날까지 여론을 주도하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결국 반란군 세력 소수만의 부의 대물림은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선사했고 정의와 민주의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