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중의 삶을 짓밟은 두 인물 처단
1. 세계평화를 위한 결단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는 망국의 한과 독립의 의지를 담은 채 '세계평화'의 역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진두지휘하고 제국주의 일본의 기틀을 마련했던 이토를 조선 민족과 세계인의 이름으로 처형한 것이다. 이토는 44세때 백작(伯爵)의 작위를 받았고 45세 때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이어 50세 때는 초대 귀족원 의장에 오른다. 근대 일본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무려 네 차례에 걸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일본의 패권주의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서 대한제국도 희생된다. 1905년 65세 때 한국을 방문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 통감에 오른다. 조선 식민화의 선봉이었다. 이 같은 공이 인정돼 67세 때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다. 1909년 6월 14일 한국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여행에 나섰다가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총격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이 곧바로 이루어지거나 동양의 평화가 달성된 것은 아니지만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시발점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동양평화론'은 그 사상과 철학적 깊이로 인해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일본인들에게 조차 존경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우리는 온전한 민주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친일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그 영화를 이어오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독립성과 민주성 확립에 대해 끊임 없는 방해를 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조차도 찾을 수 없는 현실은 역사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을 수도 없이 일본 제국주의가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친일 반민족 세력들은 비웃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활보하고 있는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상황이다.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 대접을 받으며 지금도 우리들을 희롱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영웅들은 아직도 거짓 역사의 장벽에 막혀 외로이 서 있다.
2. 반란군 박정희의 10.26
민주주의와 헌법을 유린하고 주권자인 국민을 짓밟은 박정희의 독재 공포정치는 위의 사진으로 이미 예견할 수 있었다. 만 18년 5개월 넘게 독재자의 자리를 지키던 그는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총에 의해 세상을 마감한다. 아직도 추종 세력들이 박정희를 조명한답시고 '업적'을 들추어낸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를 손바닥으로 감추려 한들 감출 수가 있겠는가.
4.19 민주혁명을 통해 민의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있었고 헌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소장'계급을 단 박정희는 반란을 일으켰다. 군 통수권자와 국민에 대한 반란은 그 어떤 궤변으로도 감추어질 수 없다. 그로부터 시작된 사회구조의 왜곡, 그 잔당들이 지금도 철통같이 틀어쥐고 있는 악순환에 갇힌 대한민국. 언제쯤이면 잘못된 구조가 깨지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지 기약조차 하기 힘들다.
70년을 사이에 두고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두 인물이 총탄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갔다. 제국주의의 첨병은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되었으나 그 이후의 상황은 안중근 의사의 생각과는 달리 암담하기만 하다. 민주주의 말살의 원흉인 또 한 인물도 심복에 의해 처단되었으나 그가 키워놓은 새끼들에 의해 더욱 처절하게 민주주의가 짓밟혔으며 그 패거리들이 심어놓은 싹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만개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고 뜻을 이어받는다고 해서 역사가 바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전기를 읽으며 감동 받는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 잘못된 것에 맞서고 불의와 싸울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삶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이 민주화 되지 않는다면 원흉 하나 죽는 것이 개인의 삶과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